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폭력을 가한 사람을 용서하기 쉽지만, 폭력을 가한 사람은 자신이 때린 사람을 용서하기 어렵다."
- 라 로슈푸코


9.11 사태가 터지자 미군은 다짜고짜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 부녀자와 이라크의 노약자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학살했다. 그들에게는 대량학살무기의 존재도 유엔의 존재도 의미가 없었다. 단지 복수할 꺼리만 있으면 됐다.
이스라엘이 세운 괴뢰정부의 수장인 바시르는 기독교도 극우파로 이루어진 팔랑헤당 민병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팔랑헤당은 이것이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판단해 암살 이틀 뒤인 1982년 9월 16일 서부 베이루트 지역에 있는 사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학살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아무런 증거도 필요치 않았다. 이스라엘은 조명탄을 쏘며 이들의 학살을 비호했다.

이미 히로시나, 나가사키에 워자폭탄을 터뜨릴 때부터 세계는 정글보다 더 동물적인 전쟁상태로 변해버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일본을 제압하기보다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 열강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 이후로 여러 나라로 핵무기가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핵무기가 주는 위협과 거기 대응하고자 하는 자기방위의 논리 때문이었다. 결국 '핵'을 가지면 그나마 멸망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고, '핵'마저도 갖지 못했다면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기막힌 상황이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보면 '억지력'을 갖고 있지 않은 국가 혹은 정권이 얼마나 비참하게 몰락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북한은 '핵'을 가진 덕분에 미국에게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을 정도다.

전쟁이 없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이 버려놓은 씨앗이 국가를 마약중독자(전쟁중독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미국이 어떻게 씨를 뿌렸는지 반추해 보자. 약소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 체제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 전복시켜 왔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아예데 정부의 실각에는 CIA가 깊이 관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런 미국에게 폭력의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홀로코스트를 경험했음에도 중동 안에서 타 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주도했거나 방조했다. 그것이 사브라-샤탈라 학살 사건이다.
팔랑헤당이 팔레스타인의 어린이, 할머니, 임산부 등 3,000여 명을 살해하는 동안 샤론 국방장관은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해임될 수밖에 없었다. 샤론은 이스라엘 북부, 즉 레바논 남부를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레바논 정부를 전복시켜 자신의 꼭두각시를 심는 무리수를 두기에 이른다. 그 꼭두각시가 바로 바시르 제마엘이었다. 사실상 바시르의 암살이나 사브라-샤틸라 대학살 사건은 샤론 총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임된 지 20년이 지난 후 샤론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즉 총리가 되었다. 2006년 식물인간이 될 때까지 샤론은 중동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자로 남았으며 그보다 더 위험한 인물은 다시 태어나기 힘들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껍데기부터 속알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형제 국가다.


감성과 공감만이 폭력의 씨앗을 녹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폭력이 영원한 방패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9.11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 국가들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손바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국가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악의 축'이라는 굴레를 씌워 지구를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던 미국이 지금은 UN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최근 경제 대위기의 벼랑 끝에 몰리면서 위축된 듯 보이지만, 미국의 네오콘들은 어떤 상황을 빌미로 다시 기승을 부릴지 알 수 없다. 인간은 밑바닥에 떠밀리지 않고서는 좀처럼 겸허해질 수 없다.

독일은 완벽한 패배를 겪고 나서야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끊임없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에 비해 패배를 경험해보지 못한 여타 서구 국가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관련하여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겸허한 감정은 겸허할 수 있는 상황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쉽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종철 선생은 <땅의 옹호>(녹색평론)이라는 책 속에서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바로 타자의 내면을 이해하는 감정이입(empathy) 능력"이라고 말했다. 9.11 이후에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는 테러와 협박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는데, 미국 사람들은 안전 지대에서 살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애국법 등 극단적인 조치들로 인해 사생활은 물론 안전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라크 전장에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국가의 군대는 외국인보다 실제로 자기 국민들을 더 많이 죽여왔다는 말처럼 미국은 자국민들을 수없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아 왔다.
"정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군대가 아니라 '시민'이다"라는 말이 있다. 폭력에 대한 반감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므로 세계 시민들은 미국 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연대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연대와 공감을 훼손하는 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폭력에 대한 공포감이다. 사실 우리는 이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땅의 옹호>의 저자는 전쟁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가동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근원적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부의 공평한 분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다급하고 절실한 것은, 미국식 생활방식 혹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묻고,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저항한다고 하면서 실은 비인간적 체제의 영구화를 돕는 신민 혹은 노예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178쪽)

김종철 선생이 '근원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한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뿐만 아니라 그 전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뿌려놓은 폭력의 씨앗은 이미 원죄처럼 우리들의 마음속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근원적인 상상력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헛수고일 수밖에 없다. 심연에서 나를 위협하는 공포감을 이기고 나의 동료를 찾아 손을 내밀고 저항하는 길만이 세계에 뿌려진 폭력과 피의 씨앗을 벗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Posted by 소셜북스

댓글을 달아 주세요